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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년)에 왕의 어머니(세조의 비 정희왕후), 아버지(덕종의 비 소혜왕후), 할머니(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수강궁’이라 불렸으며, 경복궁과 창덕궁의 부속 궁궐 역할을 하였습니다.이후 여러 차례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습니다. 광해군 대에 복구되었고, 영조와 정조 시기에는 왕실의 중요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여 궁궐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1983년부터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다시 ‘창경궁’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고, 현재는 궁궐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 부분에 있는 중층 삼 칸 누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가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행랑채가 있습니다. 이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습니다.
동궐도(東闕圖)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큰 그림으로,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건물의 이름을 기재하여 궁궐 연구와 복원 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을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동궐이 가장 전성했던 시절을 기록하여 예전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2. 창경궁 건축물에 얽힌 역사 읽기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단청이 화려하며 조선 시대 궁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궁궐을 방문하는 첫 관문입니다.
아까운 소현세자와 홍화문 이야기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만 에 돌아왔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홍화문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외교관 역할을 해 냈으며,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면서 장차 조선을 새롭게 변혁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이나, 병석에 누운 지 3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 있던 세자를 독살했으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근대사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명정전(明政殿)
창경궁의 중심 전각으로, 왕이 공식적인 정사를 보던 공간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법전(法殿)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종과 명정전 이야기
명정전은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은 듯 합니다.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대에는 노인들에게 경로잔치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보다는 왕실의 연희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았습니다. 성종 은 세조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숙모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형 월산대군 등 서열이 높은 어르신들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습니다.
문정전(文政殿)
왕이 학문을 연구하고 사색하던 공간입니다. 숙종, 영조, 정조 등의 왕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조선 정치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입니다.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 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입니다.
사도세자와 문정전 이야기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 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습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 주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이 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습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숭문당(崇文堂)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입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1830년(순 조 30) 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는데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어 있습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입니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현판은 영조의 어필입니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을酒宴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함인정(涵仁亭)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 11) 건립된 정자입니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 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습니다. 이곳에는 원래성종 15년에 지은 인장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뒤인조 11 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 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습니다.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環境展)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입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 침전입니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가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합니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습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 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습니다. 지금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입니다.
특히 경춘전 인정문에서 내의원 쪽으로 올라가는 도중 오른쪽에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하던 어연과 주정소(晝停所:국왕의 능행 등 행차 때 잠시 쉬기 위한 용도의 구조물), 외바퀴 의 초헌, 마차와 승용차들이 전시된 건물이 있어 승용차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의 의녀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입니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됩니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습니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 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옵니다.
통명전(通明殿)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입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습니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 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 비의 빈 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 자리 에 오른 인물입니다. 숙종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 강화를 꾀했습니다. 균을 세자로 책 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는 남인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고,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3. 창경궁에서 즐길 거리
야경 투어
창경궁은 야간 개장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저녁에 방문하면 조명이 비춘 궁궐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통 문화 체험
창경궁에서는 전통 궁중 복식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기도 하며, 역사 해설 투어도 진행됩니다.
봄꽃과 단풍 감상
창경궁은 벚꽃 명소로도 유명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루어 사진 촬영을 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4. 창경궁 방문 정보
-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운영 시간: 오전 9시 ~ 오후 9시 (입장 마감 오후 8시)
- 입장료: 성인 1,000원, 청소년 500원, 만 6세 이하 무료
- 휴궁일: 매주 월요일
👉 자세한 정보는 문화재청 창경궁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창경궁은 단순한 궁궐이 아니라, 조선 시대 왕실의 생활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다음에 서울을 방문하신다면 꼭 한 번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